세례명 그리고 오페라 타이스에 대한 개인잡담
(+오페라 타이스에 대한 약간의 내용이 포함되어 지루합니다 ㄷㄷㄷ)
제 세례명은 아나스타시아입니다. 다들 그러면 눈이 휘둥그래져서 ‘공주?’ 이럽니다. 네, 러시아 로마노프 왕조의 마지막 공주 아나스타샤가 바로 이 이름입니다. 동방 정교회에서는 이미 성녀로 추대되었다…라는 낭설은 돕니다만, 저는 잘 모르겠고, 그냥 제가 존경하고 인생의 스승으로 따르기로 한 이 성녀분은 굉장히 조용한 삶을 사신 분이셨어요.
아나스타시아라는 이름을 가지신 분들은 의외로 여러명이 있습니다. 특히 아직 성 안토니우스(성 앙투안의 유혹을 읽다보면 눙물이…;;;)가 살아계셨던 마지막 교부들의 시대였던 이때만 해도 비잔티움 제국(또는 자신들을 그리스 제국이라 칭하기도 했습니다)은 아직은 로마 제국이라 불리었으며 이 시대에는 신앙의 거점이었습니다. 알렉산드리아같은 주요한 도시들이 또한 있었지만 역시 중심은 콘스탄티노플이었겠죠. 당시에 신앙의 옹호자를 자처하는 황제가 살고 있는 곳이었으니까요. 아나스타시아라는 이름은, 이 소아시아와 흑해 연안의 그리스 제국에선 아주아주 흔한 이름이었습니다.
참고로 아나스타시아라는 이름을 받은 성녀는 모두 4사람입니다.
1. 3월 10일의 성녀 아나스타시아
자세한 생애는 알 수 없지만 성녀 아나스타시아가 이집트 출신으로서 콘스탄티노플(Constantinople) 궁중의 시녀였음에는 틀림없다. 그녀의 미모가 지극히 뛰어나 황제 유스티니아누스의 마음을 사로잡았기 때문에 황후 테오도라의 질투가 극에 달했다고 한다. 하지만 성녀는 온순하고 마음이 착한 사람이었고 또 늘 하느님을 두렵게 여기며 살았으므로, 황제의 총애와 황후의 질투를 피할 양으로 밤중에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Alexandria)로 피신하여 수녀원으로 숨어버렸다.
황제는 밤낮으로 그녀를 잊지 못하다가 테오도라가 죽은 뒤에 그녀를 찾으려고 노력하였다. 그 소식이 그녀의 귀에 들어갔을 때 성녀 아나스타시아는 사막으로 은신하여 지내다가 다니엘(Daniel) 원장이 지도하는 공동체에 들어갔는데, 다니엘은 그녀를 어느 동굴에서 지내도록 배려하였다. 그래서 그녀는 기도와 고행에 전념하여 높은 경지에 도달하였다. 그 후 그녀의 유해는 콘스탄티노플로 옮겨져 성대하게 안장되었다.
2. 4월 15일의 성녀 아나스타시아
근거는 희박하지만 성녀 바실리사(Basilissa)와 로마(Roma)의 귀부인 성녀 아나스타시아는 개종자들로서 성 베드로(Petrus)와 성 바오로(Paulus)의 제자가 되었다. 그들은 박해를 받아 죽은 두 성인의 시신을 발견하여 장사지냈는데, 이 일로 인하여 그들 역시 투옥되어 모진 고문을 받은 후 네로 황제의 명에 따라 참수되었다고 한다.
3. 10월 28일의 성녀 아나스타시아
발레리아누스 황제의 박해 때 로마(Roma)에서 순교한 성녀 아니스타시아는 동정녀였다. 그녀는 총독 프로부스(Probus)에게서 불과 매로 고문을 받았으나 끝끝내 그리스도께 대한 신앙을 고백하였다. 그래서 총독은 그녀의 가슴을 도려내고 이빨을 뽑았으며 손발을 잘라냈다고 한다. 그래도 살아 숨을 쉬면서 배교하지 않자 박해자는 하는 수 없이 참수시켰다는 것이다. 성 키릴루스(Cyrillus)는 그녀가 목말라하는 것을 보고 물을 갖다 주었다가 순교하였다. 그 당시 아나스타시아는 훌륭한 집안의 딸이었고, 동정을 지키려고 혼자 서원하였으며 순교할 당시에는 20세였다고 한다. 현재 이 두 성인은 콘스탄티노플(Constantinople)에서 크게 공경을 받는다.
4. 12월 25일의 성녀 아나스타시아
판노니아(Pannonia) 시르미움(오늘날 유고슬라비아의 미트로비카) 태생으로 알려진 성녀 아나스타시아는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의 박해 때 감옥에 갇힌 신자들을 만나기 위해 아퀼레이아(Aquileia)에서 시르미움으로 갔다가 붙잡혀 같은 해 12월 25일 팔마리아(Palmaria) 섬에서 참수당했고, 유해는 훗날 성당으로 바뀐 아폴로니아(Apollonia)의 집에 안장되었다.
전설적인 자료에 의하면 그녀는 로마 귀족 프레텍사투스(Praetexatus)의 딸로서 이방인이던 푸빌리우스(Pubilius)와 결혼하였다. 남편이 죽자 그녀는 페르시아로 선교여행을 떠나 아퀼레이아까지 갔다가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의 박해로 그녀 역시 체포되었다. 그녀는 배에 실려서 팔마리아 섬으로 끌려갔는데, 그 배에는 죄수들이 가득하여 괴롭힘을 당하다가 성녀 테오도타(Theodota)의 도움으로 기적적으로 구출되기도 하였다. 그녀는 5세기부터 로마(Roma)에서 공경을 받고 있으나 그녀에 관한 이야기들은 근거가 희박하다.
대부분 4월과 10월의 아나스타시아 성녀를 기억하실거 같아요. 하지만 제 세례명은 그분도, 이분도 아니고 3월토끼…..;;;;가 아니라 3월의 아나스타시아 성녀입니다. 은수사로, 그저 전설로 전해져 내려오는 것은 그분의 아름다움과 황제의 구애와 그에 따른 약간은 로맨틱한 그분의 수도원으로의 도피입니다. 어떤 생애를 살고 어떤 저작을 남겼는지는 도무지 단서는 없었어요. 하지만 사람이라는게 정말 육감이라는게 있어서 뭔가 느껴지는 걸까요?
오오~ 이쁘셨대+_+ 게다가 안전제일!! 순교하신 분이 너무 많아서 안전제일주의라는 썩은 사심도 있었습니다만, 진짜 이유는 이것에 있었어요.
(여기서부터는 오페라(원작소설도 포함) 타이스에 대한 소소한 잡담이 시작이라 좀 산만합니다^^;;;)
90년대 이후 최고의 타이스라는 찬사를 받는 르네 플레밍 언니. 엄청 예쁘시지 않습니까. 이무렵도 40대인데. 저 순진한 얼굴과 귀여운 표정은 천사같아요+_+ 타이스는 정말 저런 여자였겠구나 싶은 느낌.
전설의 메사보체, 과체중에도 불구하고 20세기 가장 아름다운 여인일지도 모르겠어요. 몽셰라 카바예 여사가 부른 타이스의 저 거울 독백 장면. 르네 언니가 좀더 자조적으로 ‘타이스, 너는 늙고 말거야’ 하며 씁쓸하게 중얼거리는 느낌이라면, 카바예 여사는 뭐랄까, 애잔한 슬픔이 묻어납니다. 워낙 메사보체라던가, 고음에서 끊어지지 않고 유연하게 넘어가는 독특한 창법을 구사해서 그런지는 몰라도 좀더 목소리 면에서는 산전수전 다 겪은 타이스가 아니라 아직은 순수함이 젊음이 남아 있는 타이스랄까…… (뱀발이지만 제가 이래서 인생을 다 산듯한 지쳐보이는 르네 언니의 비올레타를 좋아하는거 아닙니까^________^)
Ah! Je suis seule….Dis-moi que je suis belle라는 마스네의 오페라 타이스 중 2막에 나오는 아리아예요. 소화하는 분에 따라 굉장히 어둡고 불길한 느낌까지 드는 노래입니다. 뜻은, ‘아, 난 외롭다…… 내가 아름답다고 말해줘’.
이게 무슨 달밤에 필라테스 체조를 한답시고 노란 추리닝 입고 이단 옆차기를 하는 쌩쇼야! 라고 하실지도 모르겠습니다만^^;;; 배경 설명을 하자면 이렇습니다. 아름다운 알렉산드리아의 여배우, 쿠르티잔인 타이스는 화려한 연회가 끝나고 홀로 자신의 저택에서 문득 두려움에 사로잡힙니다. ‘타이스, 넌 언젠가 늙을 것이다, 늙게 될 거야.’ 그녀는 거울을 향해 끊임없이 중얼거리죠
오페라에서는 약간 신파조로 흘러갑니다만 아나톨 프랑스의 소설에서는 그녀의 동기가 단순히 늙는다는 것에 대한 두려움만이 아니었습니다. 이대로 덧없이 흘러가버리는 인생, 그리고 어릴때 그녀를 키워줬던 노예이자, 순교자로 죽음을 맞은 누비아의 성자 테오도르가 가르쳐주었던 영원한 삶과 진리에 대한 동경이지요.
결국 그녀는 성자라 불리는 수도원장 파프뉘스를 따라나서게 되고 그토록 찾던 지복에 도달하게 됩니다. 열병으로 죽어가면서도 푸른 하늘을 바라보는 그녀의 눈동자에는 하느님과 사랑하는 양아버지이자 대부인 테오도르를 드디어 만나게 된다는 기쁨만이 가득할 뿐입니다. “아, 얼마나 아름다운지!”
그녀와 달리 철저하게 위선적이었던 파프뉘스가 그녀의 곁에서 이제서야 타이스에 대한 사랑과 집착과 욕망에 가득차서 울부짖는 것과는 달리,(자기 친구 니시아스가 그녀의 연인이었다는 것을 알고 있기에 죽여버릴까 생각까지 하는 엽기성을 보입니다ㄷㄷㄷ) 그가 그토록 ‘더러운 매춘부’라 멸시했던 과거를 지닌 그녀는 구원받습니다. 반면에 위선과 교만에 쩔어 형식적인 신앙만을 중시했던 파프뉘스는 고행한답시고 돌기둥에 올라가고 악마에게 속아서 가짜 성자 노릇까지 하며 사람들을 현혹하는 온갖 기행을 저지른 끝에, 자기 욕망을 깨닫는 순간 결국 인간이 아닌 흡혈귀가 되죠. 그가 그러는 중에도 느낀건 증오와 중2병스러운 쩌는 자기연민(결국은 난 잘났는데 이게 뭐냐라는 식의)과 원한 밖에 없습니다. 당연히 말로가 좋지 않을 수 밖에요. 원래부터 그랬지만 그걸 결국 고치지 못했던 인간이니. 세상엔 훌륭한 수도자도, 사제도 많은데…… 뭐 저런 이뭐병이 다 있나 싶습니다.
물론 풍자로 광신과 위선을 사정없이 비웃던 아나톨 프랑스이지만, 그러한 파프뉘스 역시 한없는 연민의 시선으로 바라봅니다. 그 역시 ‘나약한’ 한명의 인간이었기 때문에…… 하긴, 저역시 매일매일 죄악에 찌들어 사는 또 한명의 나약한 인간이기에, 비호감 파프뉘스도 가끔은 불쌍해지더군요. 뭐 저는 성질이 못되어먹어서^^;;;;
오페라는 신파조를 가미해 좀더 서글프게 마무리를 짓습니다. 남자 주인공은 그녀를 순수하게 구원해주려는, 좀더 강직한 수도사 아타나엘로 바뀌었습니다. 어쩌면 여기에서의 아타나엘은 남자들의 품에서 품으로 옮겨다니며 덧없는 인생을 사는 그녀를 사랑하고 있다는 생각을 못하고 그저 연민이려니 생각했는지 모릅니다. 그는 그녀를 데리고 알렉산드리아의 성난 군중들을 뚫고, 먼 사막을 헤쳐나가며 그녀에게 몹시도 다정하고 따뜻한 사랑을 보여줍니다. 단 한번도 타이스가 받지 못했던 그런 종류의 사랑이었죠. 아버지나 오빠같은 혈육과 같은, 또한 진실한 연인과도 같은 그의 사랑에, 지친 타이스를 위해 자신도 역시 지쳤으면서도 물을 떠다주려가는 아타나엘의 듬직한 사랑에, 타이스는 감격하며 ‘저분께 축복이 있기를’ 이라고 작은 소리로 되뇌입니다. 어쩌면 그것은 그들의 가장 순수한 사랑인지도 몰랐습니다. 차라리, 아타나엘이 수도사가 아니었다면 이 오페라는 진실한 사랑에 눈을 뜬 두 연인이 어딘가 먼 변경에서 소박하게 살아나간다는 ‘라 트라비아타’의 해피엔딩 버전이 되었을지도 모릅니다.
제목은 ‘오, 하느님의 사자여, 제 손을 씻어주세요’ 성스럽습니다만 실은 솔로지옥 커플천국의 연애 에피소드. 그들의 행복했던 한때. It must have been love라는 옛날 팝이 배경음악에 흘러나와도 그닥 위화감이 없는 저 장면. 워낙 우리 햄프슨 아저쒸의 자상한 눈길이 한몫 했습니다만. 이거 나름대로 성스러운 내용인데 순식간에 사랑 이야기로 탈바꿈시키는 아저쒸의 저력.
그러고보니 르네 언니 비올레타, 햄프슨 아저씨가 제르몽 역으로 나오는 라 트라비아타는 대체 어떤 분위기일까 생각이 드네요. 이 오페라를 봐서 그런지 둘이 나올 땐 분위기 묘할거 같은데 왠지 ‘훗.. 풋내기는 가라. 역시 연륜있는 남자(게다가 제르몽 아내 여의고 홀몸!!)!’ ‘널 내 며느리감으로 인정할 수 없어! 왜냐하면… 왜냐하면 내 타입이니까! 결혼해주세요♡’ 첫눈에 반해 서로의 마음을 고백하는 두 사람…… 이러면서 손에 손을 맞잡고 도피하며 알프레도는 졸지에 사랑하던 여인을 어머니라 불러야 하는(!) (조셉 칼레야는 니시아스 역으로 타이스에 나왔는데 여기서도 뺏기나요? ㅎㅎㅎ;;) 그러다가 피를 토하며 죽는건 알프레도…… 그런 막장적인 내용이 제 머리 속에 펼쳐집니다.
하지만 아타나엘은 평생을 하느님께 바치기로 서원한 몸, 그리고 타이스 역시 그렇게 될 운명이었기에 그들은 아쉬운 이별을 하게 됩니다. 그러나 그 다음이 문제였죠. 아타나엘은 아름다운 타이스의 환영에 시달립니다. 아니, 차라리 악몽이겠죠. 환상 속의 그녀는 그를 향해 순진하게 웃기도 하고 매우 유혹적인 자세를 취하기도 합니다. “나도 인간이야, 제길!!!” 두손 두발 다 들어버린 아타나엘은 모든 것을 버릴 각오를 하고 타이스에게 사랑을 고백하러 가지만! 타이스는 그때 죽어가는 중이었습니다. 천상에 대한 이야기만 늘어놓는 그녀를 향해 ‘타이스! 제발 죽지마! 당신을 사랑해!’ 라고 외치는 아타나엘 옵화. 그저 눙물이…(…) 물론 타이스도(무려 원작소설에서조차) ‘그 사막에서의 우리 이야기, 우리가 같이 본 풍경을 기억하나요?’ 하며 못다한 연심을 털어놓는 듯 합니다만, 성녀가 되신 우리 타이스는 우선 하늘나라가 일순위입니다. 연애는 무신! 연애? 그건 먹는건가요? 하늘나라엔 커플 따윈 엄써! 솔로천국 커플지옥!! ㅎㅎㅎ
아, 눈물 납니다. 사랑하는 여인을 데리고 도망치지도, 또 그녀를 살려낼 능력도 없는 이제는 평범한 남자로 다시 타이스 앞에 선 아타나엘. 그가 할 수 있는 건 그저 줄창 우는 것 뿐이었습니다(읭?). 금방이라도 타이스 따라 죽을 것 같은 아타나엘 옵화입니다만, 아 글쎄, 하늘나라엔 연애 따위 없다니까요!! 다시 수도원에 가셔서 성스러운 삶을 계속 사세요. “어차피 인구도 자꾸 늘어나는 판에 무신 연애질에 결혼을 한다고!”(이건 제가 한 말 아닙니다. 과연 누가 한 말일까요오? 맞추시는 분께는 경품을…… 같은건 다 뻥이고, 아마 맞출 수 없을걸요ㅎ)
그래도, 채워지지 않는 욕망과 원한에 ‘죽은 네 피라도 갖겠다’라며 흡혈귀가 되는 파프뉘스보단, ‘주님, 부디 자비를!’ 처절한 외침에, 죽은 타이스에게 매달려 목놓아 우는 인간적인 아타나엘이 훨씬 낫습니다. 캐릭터 보정이 원작보다 너무나 잘된 오페라의 전형적인 예인듯.
이건 다른 타이스 공연 장면인데 제가 가장 좋아하는 소프라노 중 하나인 Eva Mei가 나와요. 누워서 노래를 부르는데, 진짜 누워서 저렇게 청아한 노래가 나올까 싶을 지경입니다. 이쪽은 뭐, 진짜 성녀가 죽어가는 분위기. 에바 메이 목소리 자체도 천사같은데, 진짜 회개한 여인-성녀로 보이려고 머리까지 쥐 파먹은듯 밀어놓았어요. 이루어질 수 없는 애처로운 커플 느낌을 살린 플레밍-햄프슨 조합과는 달리 메이-페투시 커플은 아나톨 프랑스의 원작을 살렸나봐요. 정말 천국의 문이 열려 그녀를 맞으러 온 천사를 본듯한 타이스의 황홀감을 에바 메이가 표정과 노래로 잘 표현했다면, 페투시의 아타나엘은 원작 주인공 파프뉘스 못지 않은 짐승남의 포스를 퍽퍽 풍깁니다. 엄마 쟤 기어다녀;;;; 저러다 진짜 원작처럼 죽은 타이스 목 깨물 분위기? 호러다!!! ㅡ0ㅡ;;;;
이거 뭐 결론은 솔로천국 커플지옥이라는 심오한 메시지(틀려!!)를 던지고 있는 오페라 타이스 이야기가 아니니까, 다시 제 세례명 이야기로 돌아가겠습니다.
유아세례가 아닌, 스스로 선택해서 입교를 한 경우, 어른이라면 자신이 선택한 세례명을 가진 동일 성인의 삶을 어느정도 모범으로 해서 살 각오를 해야한다고 생각합니다. 어찌되었든 자신이 고른 이름, 자신이 존경하는 성인이니까요. 물론 유아세례라 아무것도 모르고 부모가 정하는 대로 한다면 예를 들어 라우렌시오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은 자라서 분통을 터뜨릴 수도 있겠습니다. “하필이면 왜 석쇠구이 성인이냐고요오~!! 왜! 왜!!” 특히 불이라도 나서 머리가 홀랑 타는 이변이라도 당하면 더더욱 부모님이 원망스러울듯 ㅠㅠ
성 라우렌시오에 대한 이야기는 이쪽에. 이분 유머 감각도 엄청나셨다던데요. 한쪽을 구우니 ‘한쪽이 익었네, 뒤집게~’ 그리고 ‘자, 이제 잘 익었으니 드시게나’. 그나저나 이런 얼짱 성인을 석쇠에 굽다니 로마 총독 미친넘…… 아마 열폭했나봅니다. -_-++ 근데 이분 요리사의 수호성인이랍니다.^^;;;;
뭐, 저런 경우가 아니면 결국은 자신이 고르니까, 그분의 생애에 대해 어느 정도는 알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근데 저의 수호성인, 제 세례명의 기원인 아나스타시아 파트리시아(Anastasia Patricia)는 파트리키우스(Patrician) 출신의 아나스타시아란 뜻입니다. Patrician이라는게 원래 고대 로마의 귀족 계층을 가리키는 말이더군요. 유스티니아누스 1세 황제가 다스리던 비잔티움(동로마) 시대에는 매우 고귀한 집안 출신을 가리키는 말로 쓰였던 것 같습니다. 이집트 총독의 딸이었다고도 하고, 그 아내가 될 사람이었다고도 하니까 상당한 계층에서 태어났던 것 같습니다.
상당한 미모와 좋은 배경의 집안을 타고 태어났기 때문에 테오도라 황후에 질린 유스티니아누스 황제가 꽤나 열렬히 구애했던 것 같습니다. 뭐, 테오도라 황후, 역사상의 여인으로 꽤 매력있죠. 정말 비천한 출신이었습니다. 타이스처럼 무희였고요. 그러나 어느날 극적인 회개를 하면서 그녀는 정치적, 종교적으로 완전히 바뀝니다. 유스티니아누스 1세의 든든한 정치 파트너로서, 또한 극단적인 단성론자로서, 그녀가 후원하던 주교들이(전직창녀 테오도라 황후라고 공공연하게 그들에게 불렸음에도 불구하고) 궁지에 몰리게 되면 도와주는 기지도 발휘했습니다. 한마디로 근사한 여인이었지요. 뭐 전설로는 이 황후의 질투가 두려워 아나스타시아 성녀가 알렉산드리아의 수도원으로 피신했다…… 라고 전해집니다만, 실제로 그랬을까요?
정치적으로 손을 잡았던 유스티니아누스 1세와의 인연이 그렇게 쉽게 끊어질 것이라고, 질투 하나 때문에 자신의 시녀를 미워했을거라고는 생각되지 않습니다. 물론 사람의 마음이라는게 또 모르겠습니다. 예쁘고 자신보다 젊고 자신과는 달리 곱게 자란 좋은 가문의 여자-라이벌…… 글쎄요, 하지만 이런 말을 했던 배포큰 테오도라 황후가 정말 그녀를 미워했을까요?
만약 지금 폐하께서 목숨을 부지하시기 원하신다면 폐하시여, 곤란할 것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우리에게는 돈도 있고, 눈앞에는 바다가 있고 배도 있습니다. 하지만 생각해 주소서. 그렇게까지 해서 살아남은 뒤, 과연 ‘죽는 것보다야 나았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소첩은 “황제의 옷은 가장 훌륭한 수의”라는 옛 말을 옳게 여기옵니다.
- 니카 반란 때 겁에 질려 도망가려던 유스티니아누스 1세의 앞을 막아서며.
이 정도의 배짱있는 여인이 단순히 남편의 사랑을 놓고 질투를 할리가 없습니다. 만약 그녀가 아나스타시아를 견제했다면 그건 황후의 자리를 놓고…… 였을 겁니다. 애초에 애정보다는 정치적인 야망이 비슷했던 남자와 결혼하여 권력을 추구하던 여인이라면, 아니 여걸이라면 감히 황후의 자리를 알짱대며 넘보는 잔챙이같은 것들은 쓸어버려야 마땅했겠죠. 그녀에겐 얼마든지 싸움을 걸 힘도 배짱도 남아 돌았습니다. 또한 그녀가 믿었던 그리스도 단성론과 유스티니아누스의 종교화합 정책이 충돌했을 수도 있습니다. 정통으로 인정된 교리를 믿고 있던 아나스타시아는 어쩌면 새로운 황후 후보로 적당했을 수도 있고, 그녀가 배짱만 있다면 유스티니아누스의 총애를 걸고 황후와 싸움을 벌였을 수도 있었겠습니다. 하지만 그랬다면 비참한 죽음 뿐(테오도라는 쉽게 이길 수 있는 여자도 아니고, 운도 억세게 좋았습니다), 지금처럼 성녀가 되시진 않았겠지요.
그러나 아나스타시아는 그렇지 못했죠. 아무리 좋은 가문 출신이라고 한들 야망도 없고, 순수하게 신앙심만을 가지고 살던 소박한 그녀에게 황후와의 암투는 또 뭐란 말입니까. 모든 것을 내려놓고 수도원에 자신의 믿음만을 가지고 간 그녀를, 황후는 후환이 두려워 암살… 같은 것은 생각하지 않았을 겁니다. 왜 그러겠어요? 아나스타시아는 힘이 약했고, 배짱도 없었으며, 황후와 싸울 마음도, 황제를 사랑하는 마음도 없었습니다. 그녀의 마음 속엔 오로지 하느님만이 있었을 뿐입니다.
어린 소녀들의 인신매매를 금지하고, 자신도 한때 그 처지였던 떠도는 창녀와 무희들을 위해 집을 마련해주고, 여성에게 불리한 각종 법을 개선했던 자상함, 그러나 한편으로는 자신의 정적들을 비정하게 제거했던 일면을 지닌 철의 황후는 오히려 성녀를 가엾고 딱하게 생각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어쩌면 부럽기도 했겠죠. 저렇게 순수한 신앙심을 가질 수 있을까? 극적으로 자신의 젊은 시절 방탕했던 생활을 바꾸며 회개했던 황후로서는 어쩌면 정말 부러웠을지도 모릅니다.
몇년 후, 수도원에서 살던 아나스타시아의 행복한 생활은 테오도라 황후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파토납니다(아니, 이런 속세스런 표현을!!). 황후는 아주 오래전부터 암으로 죽어가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녀는 죽는 전날까지 화려한 치장을 하고 아무렇지도 않은 듯 연회에 참석하여 황제의 곁을 지켰다고 하니, 독하다면 독하다고 할 수 있고, 진짜 여걸이라고 하면 여걸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그래도 이런 삶은 별로 살고 싶지 않습니다. 왠지 안 행복해보여서요. 진짜루요…)
이후 정치능력의 한계를 들어내며 ‘테오도라쨩이 없으니 아무것도 안돼!!’ 덕후같이 굴던 황제는, 어디선가 아나스타시아가 아직도 살아있다더라 하는 소문을 주워듣습니다. 꿈에도 못잊던 그녀, 종교문제도 왠지 해결해줄거 같고, 후계자가 될만한 아들도 아직 없는 상태입니다. 아싸, 좋다~ 무력을 동원해서라도 데려와라~ 하지만 이런 덕후와 결혼하느니(개인적인 편견으로, 동방교회 성인이라고 해도 아내 아니었으면 대제 칭호는 절대 못받았을 듯한 유스티니아누스를 매우 싫어합니다 -_-) 지금까지 유지했던 행복하고 청빈한 생활이 좋잖아요? 그녀는 극단적인 선택을 합니다.
우선 여자의 아름다움의 상징이라 할 수 있는 머리를 과감히 잘라버립니다. 이집트 사막의 어느 구석탱이로 가서, 그녀는 수도원의 다니엘 수도원장을 만나 남자로 변장한 채 수도자의 옷을 입고 어느 동굴에서 은거하며 신앙 생활을 할 수 있는 허락을 받습니다. 사실, 여자로서는 꽤 힘든 일이죠. 뭔가 안전제일주의인줄 알았더니 순교 못지 않게 힘든 삶입니다. 성녀는 아무나 되는게 아니군요;;;;;;
그녀가 그렇게 은거하고 산지 28년 후, 다니엘 수도원장은 우연치않게 ‘삽을 가지고 이리로 오세요’ 라는 메시지가 쓰여진 나무판을 발견합니다. 직감적으로 그는 아나스타시아의 죽음을 눈치챘습니다. 그가 동굴에 도착하자, 죽음에 임박한 성녀는 그에게 자신의 생애의 전부를 고백하였고 그는 그것을 기록하였습니다. 죽고 나서(하느님의 품 안에 안겼다는 것이 적당할까요…;;;) 그녀는 콘스탄티노플에 안장되어 엄청난 공경을받으며 성녀로 시성되었습니다.
이상이 우리나라 성인목록보다는 자세히 나오는 외국 위키의 설명인데, 사실 뭐랄까…… 전설일 수도 있는 이야기지만 감명받았습니다. 단순히 예쁘다, 안전제일주의에 혹한게 아니라…… 이렇게 살 수도 있구나 라는 생각을 했었어요.
사실 이분은 마음만 먹으면 좀더 편하게 살 수도 있었을 겁니다. 황후에게 붙어서 다른 사람과 결혼하여 좀더 변방으로 가서 살 수도 있었고, 정치적인 참견을 하지 않는 황제의 애인으로서 나름 화려한 궁중의 삶을 살 수도 있었을 겁니다. 비잔티움 왕조의 사치가 뭐 이만저만 화려한가요?
그런 많은 삶의 선택 중에 하필이면 선택한 것이 남자로 위장하여 아름다운 외모를 거칠게 하고 도저히 음식이라고 할 수 없는 말라 비틀어진 빵과 식수로도 쓰기 위험한 물을 겨우 한끼 정도 섭취하면서, 하루종일 기도와 독서에 전념하며, 그도 아니면 바구니같은 것이라도 짜는 노동을 한다는건……ㄷㄷㄷㄷ 성 앙투안의 유혹이라는 플로베르의 소설 일부분만 봐도 당시 수도사의 삶이 얼마나 험난했는지 알 수 있습니다. 지금도 수도생활에 헌신하시는 분들은 고생에 고생이지만, 그래도 사막에 은거하시진 않잖아요^^;;;
바로 이런 점에 꽂혔습니다.
아나스타시아 성녀는 아마도 자신에게 주어진 삶을 한탄하지는 않았을 겁니다. 그녀에게는 그런 절대고독의 은둔과 기도와 독서같은 것들이, 자신에게 주어진 얼마 안되는 보잘것없는 것들이 아마도 지상의 온갖 좋은 것보다 더 좋았던게 아닐까요? 그녀는 정말 행복한 삶을 살았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동굴의 벽이 만들어내는 어둠과 고요함에 잠겨, 관상기도로 하느님과 대화를 하면서 말입니다.
여전히 제 쓸데없는 지식의 이성은 ‘가톨릭은 아마도 가장 흥미로운, 민속종교가 원형을 유지하는 세계종교다’ 라는 엘리아데 식 흥미가 고개를 쳐들기는 합니다만, 왠지 가장 어렵고 가장 힘들다는 관상기도는 참으로 행복할 것 같습니다. 머리는 사실 차갑지만, 마음 속은 입교를 하고 예비자로 교육을 받으면서도 참 편안했습니다. 심지어는 창가에 떨어지는, 겨울날의 따뜻한 햇빛 한자락도 마치 하느님의 옷자락이 내려온 듯, 묘한 행복감이 들었으니까요. 관상기도는 역시 그보다는 백배 천배 더 행복하지 않을까요? 신과의 침묵의 대화……
기도문을 아직도 못 외우는 미련한 저는 뭐랄까, 그냥 자기 전에, 깨어나서 십자가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 조근조근 오늘 하루에 대한 이야기를 합니다. 예수님께, 하느님께, 삼위일체를 이루시는 성령께…… ‘저는 아직도 배가 고파요. 다이어트 실패한 것일까요?’ ‘저는 아직도 모자란가봐요. 화가 나고 이해를 못하겠어요.’ 밑도 끝도 없는 투정을 들어주시며 웃으시는 예수님이 문득 떠오릅니다. 뭐, 저같은 것에게 나타나시겠어요? 그건 아니지만 그래도 그러다보면 어느새 행복해지는거죠. 아나스타시아 성녀님은 이보다 백배는 행복한 느낌을 지니고 사셨을거라 생각하며, 저는 오늘도 그분께 살포시 말을 걸어봅니다. “성녀님, 오롯이 자신을 비우고 주님께 내어드릴 수 있는 하루가 될 수 있도록, 빌어주소서. 마치 당신이 그랬던 것처럼.”
























